
[우리가 잃어버린 교회다움을 묻는다] 한국교회를 바라보며 마음이 무거울 때가 있다. 교인은 줄어들고 다음 세대는 교회를 떠난다. 사회가 교회를 바라보는 시선도 예전 같지 않다. 교회의 도덕성과 공공성을 우려하는 목소리는 이제 교회 밖에서만 들려오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 원인을 세속화와 시대의 변화에서 찾는다. 저출산과 인구 감소를 말하고 젊은 세대의 가치관 변화도 이야기한다. 물론 그것들도 원인일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신앙을 가진 교회라면 세상을 향해 원인을 묻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
[세상이 교회를 떠나기 전에, 교회가 먼저 교회다움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이 질문은 어느 특정 교회나 목회자를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한국교회의 문제를 말하면서 나 자신만 그 문제에서 비켜 서 있으려는 것도 아니다. 목회자와 장로와 성도, 그리고 글을 쓰는 나 자신까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울 앞에 세워 보려는 것이다.
[교회는 누구의 것인가]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 교회”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이 어느 순간 “내 교회”, “내 자리”, “내 권리”라는 의미로 변하기 시작한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교회는 누구의 것인가. 성경은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고 선언한다(엡 1:22-23). 교회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공동체이다(행 20:28). 따라서 목회자도, 장로도, 성도도 교회의 주인이 아니다. 교회의 주인은 오직 그리스도이시다. 칼빈의 『기독교강요』가 우리에게 끊임없이 일깨우는 것도 인간의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다. 구원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며, 교회 역시 인간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조직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입술로는 “주님의 교회”라고 고백하면서 실제로는 우리의 자리와 권리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 너무 많이 다투어 온 것은 아닌가. 한국교회의 개혁은 어쩌면 이 단순한 질문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교회는 정말 누구의 것인가.
[우리는 무엇을 성공이라 불러왔는가] 한국교회의 성장에는 눈물겨운 헌신이 있었다. 가난했던 시절 자신의 생활을 줄여 예배당을 세웠던 성도들이 있었다. 생활비를 아끼며 헌금한 이들이 있었고, 이름도 없이 새벽마다 무릎 꿇어 교회를 위해 기도했던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그들의 눈물과 기도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 귀한 역사 위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질문을 피해서는 안 된다. 언제부터 우리는 ‘큰 것’을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는가. 교인의 숫자와 예산의 규모, 건물의 크기와 목회자의 명성으로 교회의 성공을 평가하지는 않았는가. 더 큰 예배당과 더 좋은 시설, 더 많은 교인과 더 큰 사회적 영향력을 하나님의 축복을 증명하는 표지처럼 받아들이지는 않았는가. 교회 건축 자체가 잘못이라는 뜻은 아니다. 금융기관을 이용했다는 사실 자체를 죄라고 말할 수도 없다. 문제는 건물보다 그 건물을 세우는 우리의 마음이다. 복음을 위해 필요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성공을 보여 주기 위해 필요한 것인가. 바벨탑을 세우던 사람들이 했던 말은 오늘의 교회에도 두려운 질문을 던진다. “우리 이름을 내고.”(창 11:4) 교회 건물 위에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으면서 그 깊은 곳에는 ‘우리 이름을 내고’ 싶은 욕망이 자리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허물어야 할 것은 건물이 아니다. 우리 안의 바벨탑이다.
[교회가 기업을 닮아갈 때] 현대사회에서 교회도 행정과 조직이 필요하고 재정을 투명하고 효율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전문적인 지식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의 경영원리가 교회의 본질을 지배하기 시작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목회자가 목자보다 경영자에 가까워지고,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보다 고객처럼 취급되며, 예배가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보다 사람을 모으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변한다면 교회는 어느새 세상의 성공방식을 따라가게 된다. 교회는 기업이 아니다. 복음은 상품이 아니며 성도는 고객이 아니다. 목회는 조직을 확장하는 사업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양 떼를 돌보는 일이다. 그러므로 천 명이 모이는 교회가 백 명이 모이는 교회보다 반드시 건강한 것도 아니며, 웅장한 예배당이 작은 예배처소보다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더 잘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교회의 참된 가치는 크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에 얼마나 충실한가에 달려 있다.
[우리는 정말 서로 사랑했는가]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주님께서 세상이 제자를 알아보는 표지로 말씀하신 것은 건물도 숫자도 재정도 아니었다. 사랑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너무 많이 들어서 오히려 너무 가볍게 여기게 된 것은 아닐까.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아름다운 설교의 문장으로 남겨 두면서 실제 교회의 삶에서는 잊어버린 것은 아닌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원수가 되고, 직분을 놓고 다투며, 재산을 두고 갈라지고, 자신의 명예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 형제를 공격한다면 세상은 우리에게 물을 것이다. “당신들이 말하는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한국교회의 쇠퇴를 모두 세상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 세상이 세속적인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교회는 본래 그런 세상 속에서 복음을 증거하도록 부름받았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세상이 얼마나 변했느냐가 아니다. 그 변화 속에서 교회가 얼마나 교회다움을 지켰느냐이다. 이제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왜 세상이 교회를 떠나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세상 앞에 어떤 교회였는가?” 그리고 더 깊이 물어야 한다.
[교회의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우리를 어떻게 보고 계시는가?] 그 질문 앞에서는 목회자도 장로도 성도도 예외일 수 없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한국교회의 회복은 세상을 향한 비판에서 시작되지 않을 것이다. 말씀이라는 거울 앞에 우리 자신을 세우는 데서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그 거울 앞에서 우리의 모습이 부끄럽게 드러난다면 변명할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어야 한다. 그것이 개혁의 시작이다. 그렇다면 이제 다음 질문을 해야 한다. 교회는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가. 500여 년 전 종교개혁자들이 교회를 다시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불러냈듯이 오늘 한국교회도 다시 말씀 앞에 서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성장전략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 자신을 향한 또 한 번의 종교개혁인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