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는 인간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중학교 2학년 어느 날, 젊은 국어 선생님이 수업 중에 던진 질문이었다. 교실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누군가는 피식 웃었고, 누군가는 무심히 창밖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질문은 조용하고 내성적이었던 한 청소년의 마음 깊은 곳에 내려앉았다.
사람과 인간을 같은 뜻의 말로만 알고 있던 어린 나에게 그 물음은 너무 크고 깊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수업은 끝났지만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 물음은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나를 따라왔다.
당시 내가 살던 곳은 충남 보령 청라의 아랫질마재였다. 학교에 가려면 논두렁길과 흙자갈길을 지나 냇가의 돌 징검다리를 건너고, 여러 산등성이를 넘어야 했다. 마지막 산을 벗어나면 넓은 들판이 펼쳐졌다. 겨울이면 매서운 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쳐 어린 우리는 그곳을 ‘시베리아 벌판’이라 불렀다.
작은 몸에 커다란 책가방을 들고 걷던 그 길은 소년에게는 버거웠다. 한 고개를 넘으면 또 다른 오르막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면 나는 그 길에서 인생을 먼저 배우고 있었다. 삶에는 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나타나는 고개가 있고, 그 고개를 지나야만 만날 수 있는 들판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은 갑자기 학교를 떠났다. 마지막 인사도 없었고, 떠난 이유에 대한 설명도 없었다. 어제까지 선생님이 서 있던 교단에는 빈자리만 남았다.
선생님은 떠났지만 질문은 남았다.
선생님이 정답을 칠판에 써 주었다면 나는 그것을 노트에 옮겨 적고, 시험이 끝난 뒤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답을 듣지 못한 질문은 내 삶의 여러 길목에서 거듭 나를 불러 세웠다.
나는 엄격했던 아버지를 생각했다. 집에서는 말씀이 적고 무서운 분이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아버지를 효자이며 지혜롭고 성실한 사람으로 기억했다. 세월이 흐른 뒤에야 나는 한 사람의 마음이 언제나 한 가지 얼굴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사랑을 길게 설명하지 않으셨다. 따뜻한 밥 한 그릇과 꿰맨 옷의 바느질 자국, 아픈 자식의 머리맡을 지키던 밤으로 사랑을 보여 주셨다. 아버지가 책임의 무게를 가르쳐 주었다면, 어머니는 사람을 살게 하는 사랑의 온기를 가르쳐 주셨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에는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친절과 욕심, 희생과 이기심, 온유함과 분노가 한 사람 안에서 뒤섞여 있었다. 인간은 자신의 선한 의지와 노력만으로 온전해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세월이 흐르고 성경을 배우면서 나는 인간에 대한 답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게 되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선언한다(창 1:27). 인간의 존엄은 지식이나 재산, 권력과 능력에서 나오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존귀한 까닭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죄로 타락하였다.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포함한 삶의 모든 영역이 죄의 영향을 받았으며,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께 돌아가거나 자신을 온전히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회복은 인간의 결심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셔야 한다. 이것이 은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새롭게 하시고,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아 가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신을 완성해 가는 길이 아니라, 은혜 안에서 새롭게 빚어져 가는 성화의 길이다.
그 길을 걷는 사람은 날마다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나의 말은 한 사람을 살리고 있는가, 아니면 상처 입히고 있는가.
사람의 존엄을 말하면서 가장 가까운 사람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는가.
믿음을 고백하면서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스도인은 사람의 눈앞에서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도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하나님 앞에 놓여 있다.
아랫질마재의 산길도, 어린 시절의 교실도 이제는 기억 속으로 물러났다. 젊은 국어 선생님의 얼굴도 오래된 사진처럼 희미해졌다. 그러나 빈 교단에 남겨진 질문은 아직도 내 안에 살아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이제 그 답을 사람의 지혜나 철학에서 찾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찾는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나 죄로 타락하였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새롭게 되어 가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참된 인간의 길은 자신을 높이는 데 있지 않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그리스도를 닮아 이웃을 사랑하며, 맡겨진 삶을 진실하게 감당하는 데 있다.
오늘도 마음속 빈 교단 앞에 한 소년이 서 있다. 산길을 넘어 집으로 돌아가던 그 소년은 아직도 조용히 묻고 있다.
‘나는 오늘,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았는가.’
나는 그 물음 앞에서 흐트러진 마음을 다시 가다듬는다. 그리고 말씀의 빛 아래 나의 삶을 조용히 고쳐 세운다.





